나는 한때 창작을 한다는 것은 곧 잘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글을 쓰면 문장이 매끄러워야 하고, 사진을 찍으면 구도와 색감이 완벽해야 하며, 그림을 그리면 비율과 구성이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믿음은 나를 더 노력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벽이 되기도 했다. 머릿속에는 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가득했지만, 막상 그것을 꺼내려고 하면 “이 정도로는 부족해”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러면 곧바로 포기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창작을 멈춘 것이 아니라, 완벽주의에 갇혀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만들고 싶은 마음이 내 창작을 가로막고 있었고, 그것이 쌓여갈수록 자신감은 더 줄어들었다. 완벽주의의 덫은 그렇게 교묘하게 나를 잡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기록조차도 ‘잘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이, 내 창작의 흐름을 가장 많이 막아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록의 가치를 깨닫기까지
어느 날, 나는 노트북을 열고 그동안 써둔 글 초안 폴더를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제목만 적힌 파일, 한두 문장만 쓰고 중단된 글, 혹은 메모처럼 흩어진 단어들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다 미완성이야’라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니, 그 모든 기록들이 지금의 내 생각과 감정을 구성해온 흔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완벽하게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그때의 나를 가장 솔직하게 담고 있는 조각들이었다.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말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아서 더 가치 있다’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기록은 결과물이기 전에 과정 그 자체였다. 글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그것을 남기는 순간의 내 감정, 시선, 고민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오히려 완성도 높은 결과물보다, 부족하고 거친 기록에서 더 진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하루하루 남긴 짧은 글을 다시 읽어보면, 그날의 공기와 기분이 다시 떠올랐다. 흐릿하게만 기억되던 시간이 선명해지고, 잊고 살았던 작은 고민들이 다시 마음을 두드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잘 만든 것’이 나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남긴 것’이 나를 이어주고 있었다. 기록은 언제나 나의 존재 증명이자, 앞으로 나아갈 힘의 원천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더 이상 위로가 아니라 삶의 원칙이 되었다.
완벽보다 기록을 선택하자 창작이 일상이 되었다
완벽을 추구할 때는 창작이 ‘특별한 이벤트’였다. 큰 결심을 하고, 긴 시간을 내고, 각오를 다져야만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록을 우선순위에 두기로 마음먹자 상황이 달라졌다. 더 이상 잘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없으니, 오히려 창작을 시작하는 문턱이 낮아졌다. ‘오늘은 글을 못 쓰면 어떡하지?’라는 불안 대신, ‘오늘도 한 줄은 남기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기록 중심으로 창작 태도가 바뀌자 매일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해졌다. 길고 완성도 높은 글을 쓰지 못해도, 오늘 떠오른 문장 하나를 적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인정해주었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멋진 풍경이나 감각적인 구도가 아니어도, 오늘 마음에 걸린 풍경 하나를 찍어두었다. 그림도 ‘완성작’이 아니라 낙서 한 장이라도 남기면 그날의 창작은 끝이었다. 그때부터 창작이 삶 속에 들어왔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숨쉬듯이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이런 루틴이 쌓이자 자신감도 조금씩 되살아났다. 잘 만드는 것은 연습이 필요하지만, 남기는 것은 연습을 통해 습관이 된다. 그 습관이 창작의 지속성을 만든다. 완벽은 멈춤을 만들고, 기록은 흐름을 만든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그렇게 기록을 선택하자 창작은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작은 기록들이 쌓여서 결국에는 내가 상상도 못 했던 큰 흐름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남긴 것의 힘
지금 돌아보면, 나는 ‘잘 만든 것’으로 평가받는 삶을 꿈꿔왔다. 인정받고 싶고, 완벽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느낀다. 진짜 나를 만들어주는 것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작품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흔적들이다. 기록은 나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준다. 오늘 남긴 글 한 줄이 내일의 나에게 질문이 되고, 어제 찍어둔 사진 한 장이 오늘의 글감이 되기도 한다.
완벽주의는 고립감을 주지만, 기록은 연결감을 준다. 매일의 기록은 내 삶을 이어주는 작은 실 같은 존재였다. 글을 쓰다가 막혔을 때, 이전에 남긴 문장을 읽으며 다시 길을 찾았다. 사진을 찍다가 감이 오지 않을 때, 과거의 사진 속 색감을 참고해 감각을 깨웠다. 그림을 그리다가 의욕이 사라질 때, 예전에 남긴 낙서들을 보며 ‘그래, 이런 것도 했었지’ 하고 다시 펜을 들었다.
이제는 안다. 잘 만든 것보다 남긴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록이 있으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기록이 있으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잊지 않을 수 있다. 기록이 있으면, 멈추고 싶은 날에도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나를 다독일 수 있다. 완벽보다 기록을 선택하는 삶. 그것이 내 창작과 일상을 잇는 가장 단단한 다리가 되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