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창작을 시작했을 때, 나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었고, 글이야말로 나를 표현하는 가장 진지한 방식이라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블로그를 운영하거나 기록을 할 때도 항상 글을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벽에 부딪혔다. 아무리 써도 만족스럽지 않은 날, 어떤 주제든 글로 풀어내야 한다는 압박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글이 안 써지는 날은 마치 내가 창작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글을 쓰기 싫은 날 우연히 그림을 그려봤다. 거창한 스케치가 아니라, 회의 중 낙서처럼 끄적인 선 몇 개였다. 이상하게도 그 작은 낙서가 내 기분을 가라앉혔고, 다시 글을 쓸 힘을 만들어줬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그토록 집착하던 ‘글쓰기’가 아니어도 창작은 가능하다는 것을. 글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었던 나의 좁은 시야가, 그 작은 낙서로 조금 열리기 시작했다.
장르의 벽을 허무니 창작이 가벼워졌다
그 후로 나는 의식적으로 장르의 벽을 허물기로 했다. 매일 하나의 창작물을 남기기로 한 1일 1창작 챌린지를 시작하면서, ‘글만 써야지’라는 생각을 버렸다. 대신, 오늘 글이 써지지 않으면 사진을 찍고,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으면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으면 짧은 낙서라도 남겼다. 그렇게 장르를 섞으니 창작의 부담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오늘 글이 안 써진다고 해서 ‘나는 창작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글이 안 되면 사진을 찍으면 되고, 사진이 안 되면 그림을 그리면 되니까. 창작의 방식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주는 해방감은 생각보다 컸다. ‘창작을 한다’는 말은 ‘글을 쓴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내 마음과 시선을 담아내면 그것이 창작이었다.
이런 방식은 하루의 리듬을 더 부드럽게 만들어줬다. 회사 일에 치여 글을 쓸 에너지가 없을 때는, 퇴근길에 보이는 풍경을 한 장 찍었다. 그날의 마음이 복잡할 때는, 의미 없는 낙서를 연필로 긁적였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장르를 바꿔서 표현하고 나면, 다시 글을 쓰고 싶은 에너지가 생기기도 했다. 장르를 섞는 일은 창작의 길을 넓히는 것이자, 지친 마음을 돌보는 돌파구가 되어주었다.
장르를 섞으면 열리는 새로운 감각의 조합
장르를 섞는 과정에서 의외의 발견이 생겼다. 글을 쓸 때는 문장으로만 표현하던 감정이, 그림을 그리면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같은 주제를 사진으로 찍으면,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그대로 담겼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면서 글을 쓰면, 평소에 떠올리지 못했던 문장과 어휘들이 흘러나왔다. 글, 사진, 그림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날은 ‘지친다’는 기분을 글로 쓰다가 막혀서 그림을 그렸다. 간단한 선 몇 개로 감정을 표현해보니, ‘지친다’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내면의 감각이 드러났다. 그 그림을 다시 보고 글을 쓰니, 이전과 전혀 다른 표현으로 문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무심코 찍어둔 그림자 사진 한 장이, 그날의 감정과 연결되면서 새로운 글감을 만들어줬다.
이런 경험이 쌓이자, 장르를 섞는 것은 단순히 표현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새롭게 조합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의 언어로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여러 장르를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창작의 재미도 배가되었다. 글만 쓸 때보다, 글과 사진, 그림을 섞어 작업할 때 훨씬 풍부한 감정과 생각이 나왔다. 창작은 이렇게 장르를 섞을 때 더 다채롭고 자유로워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남기는 용기
장르를 섞는 창작을 계속해오면서 깨달은 것은 단순하다. 글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중요한 것은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남기는 용기’라는 것이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날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안 되는 날 사진을 찍고, 사진이 없으면 글 한 줄이라도 적는 것. 그렇게 무엇이든 남기는 행위가, 나를 창작의 흐름 안에 계속 머물게 해주었다.
창작을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어쩌면 재능이 아니라 ‘남기는 습관’일지도 모른다. 남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지만, 하나라도 남기면 그 흔적이 다음 창작의 씨앗이 되어준다. 그래서 이제는 ‘글만 써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어떤 날은 글이, 어떤 날은 사진이, 또 어떤 날은 그림이 더 잘 나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장르가 아니라, 오늘도 내 마음을 꺼내어 어떤 형태로든 기록했느냐이다.
글, 사진, 그림 무엇이든 괜찮다라는 말은 내 창작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장르를 섞으면 창작이 쉬워진다. 아니, 창작이 쉬워진다기보다, ‘창작을 할 수 있는 마음’이 더 자주 열리게 된다. 그것이 나에게 가장 큰 변화였다. 오늘도 나는 고민 없이 기록한다. 글, 사진, 그림 무엇이든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