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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이 쌓이니 보이는 나의 패턴

by ultraup 2025. 7. 25.

 처음 기록을 시작했을 때는 단순했다. 하루에 한 줄이라도 적자, 한 장이라도 찍자, 한 컷이라도 그리자. 기록이 쌓이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았고, 달라지고 싶어서라도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회의감도 있었다. 이렇게 매일 조금씩 모은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내 삶이 바뀔까? 하루의 기록이란 너무나 사소하고, 작은 흔적이었다.

 하지만 기록이 10개, 30개, 50개를 넘어가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기록이 쌓인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 힘이 되었다. 예를 들어, 글을 50일 썼다고 해서 내가 50배 더 좋은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50일 전의 글과 오늘 쓴 글을 나란히 비교해보면, 내 문장 속에서 분명한 변화의 결이 느껴졌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는 작은 시도였지만, 쌓인 사진들을 훑어보면 구도와 색감의 선택이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그림도, 매일의 낙서가 쌓여가자 선의 흐름이 달라지고, 색의 조합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기록을 통해 내가 어떤 패턴을 반복하는지 알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루의 기록만 보면 알 수 없던 것들이, 한 달의 기록, 두 달의 기록을 펼쳐놓고 보면 보이기 시작했다.

기록물이 쌓이니 보이는 나의 패턴

글, 사진, 그림 속 반복되는 감정의 흐름


 내 기록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글이었다. 글을 쓰다 보면 주제가 달라져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와 표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무겁다라는 단어는 내가 피로하거나 감정적으로 지칠 때 꼭 등장했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기록 초반에는 그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찍었다. 하지만 사진이 쌓이면서, 특정 계절이나 시간대, 색감의 사진이 집중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나는 오후 4시 무렵의 빛을 가장 많이 찍고 있었다. 사진 앱의 메타데이터를 확인하니, 황혼 직전의 따뜻하고 긴 그림자가 드리운 풍경을 매일 찍고 있었다. 이 패턴은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이자, 내 마음의 안정 지대였다. 하루 중 가장 차분해지는 시간이 오후 4시라는 것을, 사진 기록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림에서도 반복이 보였다. 나는 피곤하거나 기분이 가라앉은 날에는 주로 회색이나 검정, 남색 계열로 낙서를 했다. 반대로 마음이 들뜨고 활력이 넘치는 날에는 주황, 노랑, 연두 같은 밝은 색을 선택했다. 이 반복되는 색의 기록을 모아놓고 보면, 한 달간의 기분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내 기분을 해소하는 도구였지만, 동시에 내 감정의 패턴을 확인시켜주는 거울이 되었다.

 

패턴을 알면 마음을 다루는 방법도 달라진다


 이렇게 기록물이 쌓여서 나의 패턴이 보이자, 내 마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감정이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다고 느꼈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왜 이렇게 또 다운되지’ 하고 자책했고, 반대로 들뜨면 ‘괜히 이러다 또 가라앉겠지’ 하고 스스로의 기쁨마저 경계했다. 하지만 기록 속 패턴을 발견하고 나서는, 기분의 변화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는 나만의 리듬이 있었고, 주기와 패턴이 있었다.

 예를 들어, 월말이 되면 지치는 이유가 있었다. 업무 마감과 일정 정리에 집중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동시에 소진되고 있었다. 기록 속 글, 사진, 그림에서 이 시기의 창작물이 유독 무거운 색감과 단어로 가득했다. 이 패턴을 인식하고 나자, 월말에는 의도적으로 휴식을 배치하거나, 기분 전환이 되는 산책 루트를 만들어두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또한 오후 4시에 찍은 사진들을 모아보면서, 하루 중 이 시간이 내게 쉼표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오후 4시 무렵에 자리를 비우고 회사 근처를 산책하거나 카페에 들른다. 이 짧은 루틴만으로도 남은 하루의 에너지가 달라진다.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밝은 색을 쓴 날과 어두운 색을 쓴 날을 비교하며, 내 감정 곡선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기분이 가라앉는 날도 괜찮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나의 감정 리듬을 기록으로 알게 되자,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기록은 나의 무의식을 읽는 창이다


 기록물이 쌓인다는 것은 단순히 데이터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무의식을 읽는 창이 되어주었다. 매일의 글, 사진, 그림 속에는 내가 의식하지 못한 선택과 감정의 결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반복되고 축적되었을 때, 내 안에 숨어 있던 패턴들이 하나둘 드러났다. 이 패턴은 나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돌보는 데 필요했다.

 사람은 매일 기분이 바뀌고, 선택이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예측 불가능한 존재라 느낀다. 하지만 기록은 말해준다. 우리 안에도 흐름이 있고, 주기가 있고, 되풀이되는 길이 있다고. 그 길을 알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오히려 패턴을 통해,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듯한 날에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이 기록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기록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쓰고, 찍고, 그리고, 남긴 흔적들이 모여 나의 지도를 그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지도 위에서, 나는 길을 잃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쌓이는 흔적들, 그것은 결국 나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또 다른 나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내가 창작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